아트 카메오 - 영화에서 튀어나온 그림 이야기
4. <폴리테크닉>과 <프란츠>, ‘죽음’을 향한 줌인(Zoom in)
당신은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가?
캐나다 몬트리올의 명문 공과대학 폴리테크닉의 강의실에 자동소총을 든 학생 한 명이 들어선다. 그는 남학생을 모두 교실에서 내보낸다. 남자들은 순순히 밖으로 나간다. 다음 순간 총에서 불을 뿜더니 십 여 명의 여학생들을 학살한다. 교실을 나온 학살자는 학교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더 많은 여학생들을 살해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것은 1989년 12월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캐나다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을린 사랑>, <시카리오>, <컨택트> 등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영화감독의 한 명인 드니 빌뇌브가 2009년 이 사건을 <폴리테크닉>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하였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의 초기작이다.
같은 학교 학생인 학살자는 “늘 제 앞길을 막아온 페미니스트들을 창조주께 되돌려 보내려 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영화는 학살의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주저주저하며 여학생만을 남기고 교실을 나간 한 남학생과 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한 여학생의 뒷이야기로 이어진다.
남학생은 충격과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한다. 여학생은 자신이 꿈꾸던 항공공학을 마치고 항공사에 취직을 한다. 임신한 그녀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사랑하는 법을 가르칠 겁니다. 여자아이라면 세상은 네 것이라고 말해 줄 겁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영화의 내용 전체를 휘감을 만한 그림 하나가 등장한다. 누구나 잘 아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학교의 복사실 벽면에 붙어있는 이 그림에 초점을 맞춘 남학생의 시선을 따라 카메라는 약간 촌스럽게 천천히 ‘줌인’을 한다. 높이만 보통 사람 키의 두 배 정도인 거대한 그림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군이 스페인의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폭격하여 1,50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을 참상이 벌어진 지 한 달 만에 그린 것이다. <게르니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과 어린이다. 게르니카 지역의 남성들은 대부분 파시스트 정권 프랑코에 대항하는 공화국군에 참여했기 때문에 실제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영화에서는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를 담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게르니카>의 양 옆에 배치했는데 이 또한 감독의 의도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살과 죽음이라는 주제와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미지를 성적 환희에서 찾는 것일까?
이러한 미술 작품의 대비 효과는 또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인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소와 오종의 <프란츠>는 전쟁의 비극과 여성의 심리를 교차시킨 2016년의 문제작이다. 원작소설과는 달리 영화는 독일인 여주인공 안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녀는 1차 세계대전에서 약혼자를 잃고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 앞에 불현듯 한 남자가 나타난다. 그 남자주인공 아드리앵은 전쟁 전 그녀의 약혼자가 파리 유학 중 만난 둘도 없는 프랑스인 친구였다. 하지만 (너무 인위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서로 총을 들고 전쟁터에서 맞부딪힌 두 친구는 결국 서로 방아쇠를 당겨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살아남는다. 안나는 약혼자를 살해한 아드리앵의 정체를 알게 되지만 그에게 마음을 열고 마침내 그를 만나러 파리로 향한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만난 아드리앵에게는 다른 애인이 있었다. 좌절을 겨우 딛고 일어선 그녀는 다시 한 번 좌절을 겪으며 파리에 홀로 남겨진다. 그녀는 계속 살아 나갈 수 있을까?
그녀는 죽은 약혼자가 루브르에서 제일 좋아했다는 그림을 보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 아드리앵은 그 그림을 안나에게 이야기해주면서 마네의 “창백한 얼굴의 젊은 남자가 고개를 뒤로 젖힌 그림”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막상 그 그림 앞에 섰을 때 그것은 자살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실상은 그 그림이 마네의 <자살(Le suicide)>이었는데, 아드리앵은 차마 죽음이나 자살을 말에 담기가 어려워 반쯤 접어서 감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그림이 “살려는 의지를 준다.”면서 다시 찾는다. 마네의 <자살>은 어떤 큰 고통이나 좌절감에 빠져 순간적 충동으로 선택한 죽음을 마치 현장에서 그 장면을 직접 마주하면서 그린 것처럼 빠른 붓놀림으로 완성한 마네의 극히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런데 영화는 이 그림의 상단에 마네의 대표작인 <풀밭 위의 점심>을 배치해 놓았다. 실제로 루브르에서 그렇게 작품을 걸어놓았을 것 같지는 않기에 이 또한 감독의 의도라고 봐야할 것이다. 카메라는 풍요로운 부르주와의 향락을 슬쩍 훔쳐보더니 ‘죽음’을 향해 줌인을 한다. 이 영화에는 삶에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거짓말’이 등장하는데 과연 “살려는 의지를 준다.”를 안나의 말은 진심일까? 거짓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