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공부의 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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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김애자)

 

심심공부의 별미 

 

 

요즘 내가 늙었다. 전에 없이 생긴 버릇 - 한산한 전철을 타면 재빠르게 사람들을 스캔하곤 보다 어린 사람 곁을 나의 선택지로 한다. 푸릇한 젊음이 주는 긴장되지 않는 안전감, 덜 형식적인 자유로움, 최신의 세련미, 덧붙여 옆 사람에 더 무관심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나를 차별자로 비난 말라. 나 또한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 무언의 회피를 받을 중년임을 알고 있으며, 누구나 잃어가는 것에 대한 자연스런 그리움 일터니. 

 

요즘 내가 더 늙었다. 지나가는 아가들은 내 시선의 지남철이 되어, 또 하나의 할머니로 자처하며 아무 존재도 아닌 나는 천연덕스레 여린 생명에게 온갖 축복을 퍼붓는다. 윽, 소싯적 남의 아기들에게 왠 소란을 저리 피우나 얼굴 찌푸렸던 그 상황을 내가 연출하고 있다니!

 

행동뿐이랴, 내 늙음을 의식케 하는 모습이? 미래 - 그 미지의 불안과 기대를 머금은 세계가 존재감을 잃어간다. 내일? 주어진다면 그리 특별할 것 없이 가벼운 감사를 보낸다. 과거? 무지막지한 현재 앞에 존재감 전혀 없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내 어린 시절 하면 빈 집 하나 덩그머니 그려 넣을 추억의 집. 최근 새로 들어선 은평성모병원 주변으로 흔적도 없는 물푸레골의 그 집을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나의 빛 바랜 추억을 얼마나 연결해줄까? 

 

산 아래 우리 집. 바로 산으로 연결되는 오르막이 있다. 오빠랑 싸워 둘이 함께 쫓겨나면 난 싸움 뒤끝으로 화가 넘실대지만, 우리는 함께 산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각자 회초리를 가지고 돌아가야 했기에, 상대가 더 근사한 (혹은 더 매서운) 나뭇가지를 먼저 찾게 놔들 수 없었던 경쟁심. 사실은 서로의 수준을 맞춰 언젠가 고스란히 그것을 통해 되받을 고통의 크기를 손해보지 않겠다는 번득이는 계산으로 금새 말을 틀 수 밖에 없었던 화합의 뒷산. 큰 비에 한번 축대가 무너져 부엌 한 켠이 무너진 수재를 제외하곤 꽤 튼튼하고 낭만적이었던 빨간 벽돌집.  봄, 여름이면 온 마당 가득 향기를 뿜어내던 커다란 라일락 꽃나무하며, 담장을 풍성히 감쌌던 황홀한 미색과 붉은 장미들의 넝쿨, 해당화, 봉선화, 채송화 등등으로 새들이 깃들던 꽃밭. 꼬마가 이를 악물고 아버지와 대등하게 배드민턴을 치던 마당. 더운 여름 엄마의 걸레질 따라 앞뒤로 구르며 냉기를 즐겼던 마루. 거기서 늘 쪼개지 않고 아껴 파먹는 수박이 끝이 보이면 그 수박 통을 그릇 삼아 고소한 미숫가루와 설탕, 얼음을 넣고 수박의 흰 속살이 드러나도록 박박 긁고 또 긁어 가능한 많은 양의 화채를 만들어 호사라 생각하며 즐겼던 여름 나기. 그리고. . . 나의 장소 - 대문 옆 장독대. 학교간 언니 오빠, 외출한 엄마가 오실 때까지 늘 홀로 하염없이 기다리던 곳. 동네를 내려보며, 집 바로 옆 굿을 하던 빈 공터까지 포함하면, 난 그 당시 알라딘에 나오는 쟈스민 공주의 궁궐 못지 않은 규모를 혼자 짊어진 듯하다. 단지 차이라면 공주는 궁궐 밖을 탐험할 수 있었지만, 난 곁에 라자도 없이 닫아건 대문을 결코 여는 일 없이 지켜야만 하는 어린 파수꾼. 

 

3남매의 막내로 언니, 오빠를 둔 덕에 빨리 보고 따라 할 수 있었고, 형제들을 이겨먹으려는 악발이 성질까지 성숙함으로 돋보여, 엄마는 자랑스레 그에겐 유치원교육을 생략한 탓에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우는’ 유치원 대신 홀로 세상을 등지며 짊어지는 기이한 인생을 겪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 참기름냄새 폴폴. 소풍날도 아닌데 특식 김밥이 만들어지고, 분위기는 북적북적. 뭔가 기대가 가득하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 설렘도 함께 하지 못하는 외톨이다. 어딘가를 가는데 국민학생만 가능하다는 엄마의 설명에 그 미취학 아동은 말 못할 갈망을 의연히 삼키며  맛난 김밥으로 위로는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잠시 후 함께 가는 일행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을 때, 나와 동갑인 그들의 동생이 끼어있다. 엄마의 거짓말은 너무 자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난 국민학생이 아닌 쟤는 왜 가느냐고 사실관계를 따지지도 않으며, 울며불며 나도 가고 싶다는 욕망은 더더욱 발설하지 않는다. 엄마는 감히 거스르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절대자. 훗날, 그 소풍장소는 당시 새로 선보인 남산의 어린이회관. 아이 셋을 감당하기 너무 벅찼던 엄마에게 막내는 참 수월한 희생양이었다.  

 

아이는 부모의 절대적인 존재감–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으로 엄마의 뻔한 거짓말도 절대 그럴리 없다는 현실부정으로 자기보호막을 친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믿음을 조작하는 내적구조를 그때의 나를 통해 어림잡아 본다. 

 

인생의 아이러니 – 새로 배우고 깨치고 나니, 이미 내 아이들에게 추억의 집은 오간데 없이 외로움이 꼭 닮은 과거를 만들고 난 뒤다. 그 뉘우침에선가 엉뚱한 남의 아이를 붙잡고, 너는 행복하게 많이 깔깔거리며 살라 염원하는가보다. 오랜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재미. 문외한의 심심공부가 별미다. 함께 공부하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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