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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의 인문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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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헌 인문(人紋)의 종교 19 - 창조와 아가페

posted Aug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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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19 : 창조와 아가페 

 

 

과정신학에 익숙해질수록 확연해진 것은 함석헌의 사상이다. 그는 우주와 역사를 생동하는 실재로 봤고 그 까닭을 신(神)에게 뒀다. 그건 생명의 기원을 ‘까닭’에서 찾고, 그 까닭에 얽힌 우주와 신의 사연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런 시도는 철학을 가장한 종교의 자백이 아니라, 생명 자체에 내재된 의미와 가치를 부정했던 전통신학과 근대과학을 뒤엎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는 신앙과 지성을 위협하는 예정론적 신학과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생명의 본질은 스스로 하려는 것이요, 그 자발성의 다른 이름이 자기창조성, 자기초월성, 자기구원성이다. 생명은 스스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주적 관계망 속에서 제약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 조건을 뛰어넘으려는 분투를 멈추지 않는다. 신은 이 생명의 분투에 스며든다. 그래서 생명의 ‘스스로 함’에는 항상 그 모습과 농도는 다르지만 ‘신의 뜻’이 일렁인다. 

 

우주의 진동과 역사의 행진에는 생명의 분투와 신의 부름이 서로 얽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석헌은 “역사는 신의 예정이면서 또 인격의 노력의 산물”이요, 그렇기 때문에 “낡으면서도 늘 새롭고, 필연이면서 자유롭고, 신의 예정 속에 있으면서도 도덕적이다.”고 말한다. (“새 시대의 종교” 55년 3월, 14:28-29)

 

이런 동적인 세계관에 필요한 종교지성을 위해 함석헌은 신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신을 그저 ‘있는 이’가 아닌 ‘있으려는 이’로 보고, 신의 현실을 그저 ‘무엇’이 아닌 ‘무엇이려는’ 것으로 그린 것이다. 그저 ‘무엇’으로 ‘있는 이’는 자신의 외부 즉, 우주와 역사에 대해 무심하며 (그것이 낡은 종교의 질병인 초자연주의적 이원론이다), 외부가 자극할 때 (그것이 믿음이 되었든 죄가 되었든) 간헐적 반응을 (보상으로든 처벌로든) 한다. 

 

그러나 무엇이‘려’고 하며 있으‘려’는 이는 자신과 짝하는 대상(우주와 역사)을 이방인처럼 버려두지 않는다. 그 대상과의 지속적 관계를 통해서 자기 뜻을 이루어가며 자기 세계를 지어간다. 범재신론(panentheism)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세계 이해가 함석헌의 「인간혁명」(1961년)이라는 글에 분명하다. 

 

“신은 있는 이라기보다도 영원히 있으‘려’는 뜻이다.... 그 무엇이‘려’하는 데서 영원이 나오고 또 무한이 나온다. 그러므로 역사는 자꾸 변하게 마련이다.... 생명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많으면서도 하나인 것, 많으므로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면서도 구절이 있다. 그것이 시대란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나타내는 뜻이 말씀이다.” (저작집, 2:16)

 

 

새시대의전망_resize.jpg

 

 

이렇게 우주와 역사를 ‘뜻으로 본’ 관점을 가리켜 함석헌은 ‘아가페 사관’이라고 불렀다. 이 사관(史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뜻으로 여겨진 ‘아가페’가 자아내는 힘의 성격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은 아가페다”(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고 말하지만 (요한1서 4:8), 이제껏 기독교 교회는 ‘아가페(사랑)’를 신의 일부 속성 정도로 보고, 그것이 얼마나 신에게 본질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신의 아가페는 배타적 교리로 해석되어 폭력적 정복주의의 구호마저 되었다. 

 

신이 아가페라는 말은 그 힘의 행사방식이 아가페답다는 말이다. 신의 힘을 마치 우주적 폭군이 행사하는 전지전능한 무엇으로 간주하면서, 그걸 가리켜 아가페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전지전능이라는 개념은 상상력을 요청한다.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kenosis)에서 찾았고 (빌 2:7), 함석헌은 ‘자기 제한’이라고 말한다. “우주과정의 뒤에서, 그 흐름의 밑에서, 그 생명 속에서 역사를 지어내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해 만물 속에 나타내고 만물 위에 그 생명을 붓는” 존재가 신이라는 말이다.

 

자기 제한이란 강압을 통한 ‘힘의 즉자적 실현’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생명 가운데 이루어질 ‘뜻의 적극적 허용’이다. 그 뜻은 기하학적 공간 속에서 외적인 관계를 맺는 입자들 사이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작용인(efficient cause)이 아니라, 우주적 시공간에서 맺어진 내적관계를 얽어맨 목적인(final cause)을 통해서 전달되고 교감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가시적 외형은 유약함으로 비친다. 십자가에 달려 부르짖는 아들 하나 건사하지 못한 신의 무기력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주적 인드라망 속에서 아가페에 담긴 뜻은 전체에 미치는 가장 효과적인 목적인으로 작용한다. 한 계기와 한 계기 사이의 목적인은 그 계기들을 둘러싼 우주적 관계와 그 관계 안에서 발생할 효과를 생각할 때 작용인을 연상케 하는 실제적 효과를 유발한다. 신의 뜻은 우주적 메아리로만 떠돌지 않고 생명을 유혹하는 가장 실질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이 우주의 전율과 약동하는 생명은 시인의 눈을 요구한다. 

 

우주와 역사는 과거를 씻어낼 새로움을 낳기 위해 진통하며, 그 결실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은 새로운 시공간을 지어내는 것이다. 역사의 외형을 보면 피 흘리는 폭력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 사랑이 있다. 이 아가페를 통해서 보면 사실 버릴 것이 없다. 신의 창조는 우주의 진화요, 인성의 성숙은 신성의 충만이다. 아가페의 나라가 임할 때 이 세상은 폐기되기보다는 새로워지며, 구세주가 임할 때 짓눌린 민중은 부활하여 스스로를 구원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종교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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