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덕목사 시즌2
편의점 맥주를 탐하는 지식 2
다양성의 공존은 언제나 옳다! - 설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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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지난여름, 나는 유럽에 다녀왔다. 유럽하면 또 한 맥주 하는 나라들이 즐비하니.......’ 뭐 이런 말로 자랑질을 좀 한 다음, 연관된 맥주이야기를 하면 구색도 맞고 좋지 싶었다. 그게 이번 달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난 10월14일에 날아든 유명연예인의 갑작스런 부고를 접한 후, 글은 도통 마음먹은 대로 써지지 않았다.
설리.......
25년의 삶 중 10년 간 이어진 연예활동에서 그 이는 시종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소곳하지 않았고, 그래서 여성스럽지 않았다. 페미년, 관종, 노출증환자...... 인터넷 상에서 설리에 관한 기사에는 늘 이런 단어들로 가득 찬 댓글이 꼬리를 물곤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고 했던가? 어느 틈에 그 이의 개성을 '모난 돌'로 규정한 남성사회는 키보드와 스마트폰이라는 망치와 악플이라는 정을 들고는 쉴 틈 없이 쪼아대기 시작했다. 이 ‘튀는’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남성카르텔의 전체주의성, 그 악마성은 그녀를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던 걸 그룹 f(x)에서 탈퇴할 수밖에 없게 했고, 신경정신과 약물을 끊고는 살 수 없을 만큼 쇠약하게 했으며, 끝내 그 이의 삶을 25년에서 멈추게 했다.
설리를 향한 추모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또 오래도록 진행되고 있음은 본 건이 극단적 선택을 한 1인정도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낸다. 설리의 죽음은 여성,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끝이 무엇인지에 대한 증언이다. 또 숨을 거두기 전날 밤까지 SNS상에서 지지자들과 장시간 소통을 했을 만큼 살고 싶었던 이에게 죽음을 강요했던 사회적 타살이다.
개성, 사람마다 지닌 다양성이 비난의 이유가 되는 세상....... 나는 설리의 죽음 앞에서 피에르 셀리스(Pierre Celis, 1925-2011)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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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셀리스는 1925년, 벨기에의 한적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을 도와 농장 일에 일손을 보태던 그였지만, 진짜 관심은 농장 건너편 똥쎙(Tomsin)양조장에 있었다. 15세기부터 이어지고 있던 벨기에식 밀맥주(Belgian White)를 생산하고 있었던 그곳 앞에서 피에르는 독특한 향을 맡고 여러 장비의 움직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고수와 오렌지 향 등 지역 밀맥주의 특징은 그를 맥주의 세계로 안내하기에 충분했다. 십대 후반부터 그 양조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장에서 만들어지는 맥주를 깊이 사랑했다.
맥주와 양조를 사랑했던 셀리스에게 슬픔이 찾아온 것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그것은 한때 지역 내에서만 30여개에 육박했던 밀 맥주 양조장들의 연쇄도산이었다. 이는 막강한 자본과 인기를 안고 유입된 체코 필스너 즉 라거 맥주로 인해 판로가 막혀버린 결과였다. 어린 시절부터 피에르에게 영감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던 똥셍양조장, 지역 밀 맥주 최후의 양조장마저 1957년에 끝내 문을 닫게 되었다. 오백여년을 이어왔던 밀 맥주의 맥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모든 맥줏집에서 라거 맥주만을 접할 수 있게 된 때, 피에르는 소박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것은 ‘마시고 싶은 맥주를 생산해서 마시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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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시도는 농장 헛간에서 시작되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었던 탓에 버려진 욕조 등을 가지고 맥주를 만들었다. 이때 십대부터 양조장 일을 거들며 어깨너머 배웠던 양조술이 크게 한 몫 했을 것임은 자명한 일! 소규모 양조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피에르는 양조장을 세워 상업적 생산에 나설 생각을 키워나갔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돈....... 농장과 양조장 노동자로 일 한 후, 우유 배달로 생계를 이었던 피에르에게 양조장 설립을 위한 목돈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피에르가 생각했던 것은 부모님 찬스! 긴 설득 끝에 농장을 포함해 부모님의 전 재산을 털어 셀리스 양조장을 세우는데 성공하게 된다. 1966년, 그가 41세 되던 해였다. 획일화된 라거 맥주 맛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의 관심을 다시금 전통의 밀 맥주로 돌리는 것은 결국 맛밖에 없다고 여겼던 피에르는 그 후로 십 수 년 간 거의 팔리지도 않는 맥주의 품질향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차츰 셀리스 양조장표 맥주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1980년대에 이르러 만성적자였던 양조장은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맥주에 대해 피에르는 나고 자란 동네 이름인 ‘후가르든’, 다시 말해 ‘호가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거대자본과 획일화된 입맛에 밀려 끊겨버렸던 벨기에식 밀 맥주의 부활이었다.
그 후, 고생 끝 행복시작일 것 같았던 피에르셀리스의 양조인생에 갑작스런 먹구름이 낀 것은 1985년 양조장의 대화재였다. 수익창출에 고무되어 부지와 설비를 확장한 직후였던지라 잿더미가 된 양조장을 재건할 비용이 없었다. 이때 스텔라아르뚜아로 유명세를 타던 ‘인터브루(Interbrew) 양조장’에서 호가든의 상업적 가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접근해왔다. 경영과 생산에 관여하는 조건으로 재건비용을 댄 인터브루는 그 후 기업합병을 통해 맥주계의 다국적공룡기업 ‘AB인베브’로 성장했다. 거대자본의 눈으로 볼 때 셀리스는 무능한 경영인이었다. 비싼 재료를 아낌없는 넣는 통에 생산단가는 높이는 반면, 대규모 생산과 유통에는 적합하지 않은 맥주를 만들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한 인터브루의 경영과 생산에 대한 간섭은 나날이 심해졌다. 소비자가 인지하기 어려운 정도의 차이라면 생산단가를 낮추고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라는 자본의 요구를 따를 수 없었던 피에르 셀리스는 피땀으로 일으켰던 양조장을 끝내 매각하고 말았다. 형식적으로는 매각이었으나, 자본에 의한 경영권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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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생의 가업을 놓치고 말았지만, 전통의 밀 맥주 부활이라는 꿈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꿈은 67세가 되던 1992년, 양조사로 성장한 딸과 함께 셀리스 양조장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다. 두 번째 설립한 양조장은 벨기에가 아닌 미국 텍사스에 위치했다. 크래프트 비어로 대표되는 소규모 양조장이 태동하고 있었던 당시 미국의 상황을 주시한 결과였다. 하지만 여전히 버드와이저나 밀러 같은 대규모 공장제 라거에 익숙했던 미국인들에게 벨기에식 밀 맥주는 비싸고 이상한 맥주였다. 결국 열과 성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화일로를 걸던 끝에 양조장은 2002년, SAB밀러로 팔려버리고 말았다. 첫 번째 양조장을 자본에 내어주었던 피에르에게 같은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비록 삶 전체를 걸었던 양조사업에서 두 번의 실패를 맛봐야 했지만, 개성 있는 밀 맥주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그는 틈만 있으면 미국, 유럽 등을 다니며 관심 있는 이들에게 양조기술을 전수했다. 벨기에식 밀 맥주를 향한 그의 열정은 2011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딸에게까지 계승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연 두 번째 양조장에서 수석 양조사로 일했던 크리스틴 셀리스는 위탁양조, 즉 자신의 레시피를 가지고 다른 설비에서 생산하는 방식으로 맥주사랑을 이어갔다. 이후 부친임종 후 3년째 되던 2014년에 경매를 통해 SAB밀러에 빼앗겼던 브랜드 ‘셀리스화이트’를 되찾았고, 2017년에는 딸과 함께 세 번째 셀리스 양조장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편의점 네 캔 만원의 단골손님인 호가든, 자본의 놀음 속에서 ‘오가든’으로 불리기까지 했던 이 맥주에는 피에르 셀리스의 꿈, 천편일률적인 맥주문화 속에서 개성 있고 다양한 맛이 공존하기 바랬던 그의 소망이 담겨있다. 자신의 생애를 걸고 투신했던 그가 없었다면 고수와 오렌지껍질의 향, 어떤 이들에게는 화장품 냄새 같을 수 있는 이 향과 맛은 부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꿈은 세 번째 셀리스 양조장에서 그의 딸과 손녀가 이어가고 있다. 그 이들은 절대대다수가 남성인 미국 크래프트 양조 업계에서 손꼽히는 여성양조사인 동시에 성공적인 경영인이기도 하다. 그녀들의 손을 통해 만들어진 맥주, 셀리스 화이트는 여전히 시장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라거 맥주나 밀 맥주 하면 연상되는 남부 독일식의 대세 속에서 선명하게 개성 넘치는 맛을 전해준다. 이들과 같은 사람들 덕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맥주 맛을 접하고 행복해 할 수 있다. 생각해보라. 편의점 맥주 진열 칸에 라거 맥주만 즐비한 상황을....... 참 재미없고 따분하지 않은가? 다양성의 공존은 언제나 옳다!
뱀의 발
설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문제 삼고 비난하던 무리들, 그 관음적이고 가학적인 사회 속에서 나는 결백하다 말할 수 있을까? ‘설리 노브라’와 같이 자극적인 연예기사제목을 보았을 때, 그로인해 가슴 아플 이를 생각하기 전, 성적상상이 먼저였던 적이 내게 결단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감히 머리 숙여...
이제는 더 이상 악플이 따라갈 수 없는 곳에 계신 그 이의 평안을 기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