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消滅에 대하여
제법 쌀쌀해진 바람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눈마중달 11월입니다. 2019년 달력은 달랑 두 장만 남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11월의 드높고 맑으며 쨍쨍한 하늘을 좋아합니다만, 어떤 분들은 나무와 풀들의 빛깔이 곱게 바래지다가 어느덧 낙엽이 소복소복 쌓이는 분위기에 우울감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길가에 뒹구는 낙엽에서 죽음과 소멸을 떠올리기 때문이겠죠?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죽음에 도달해서야 가능하다는 뜻이겠지요. 사람들이 한 뜻으로 일군 조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도 저도 아닌 지리멸렬 방식으로 소멸하든, 주어진 소명(召命)을 완수함으로써 스스로 소멸하든, 결국 언젠가 소멸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소멸의 길로 접어든 협동조합 길목이 2013년 6월 창립총회 당시 표방했던 소명을 되새겨 봅니다.
“하나, 길목협동조합은 누구나 차별 없이 마주하고 자유롭게 연대하여, 함께 빛나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나눔과 배움과 실천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하나, 길목협동조합은 협동조합의 근본정신을 좇아 모든 조합원들이 동등하게 주인으로 참여하여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열린 민주주의를 추구한다.”
협동조합 길목은 스스로 부여한 소명을 다 이루어서가 아니라 보다 튼튼하게 뿌리내리기 위해서 사회적협동조합 길목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우리 모두 힘 모아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사회적협동조합 길목의 소명을 다시 세우고 보다 정교하게 사업 계획을 다듬어 힘차게 후회 없게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조합원 스스로가 기획하는 소모임 활동들도 여기저기서 펼쳐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푯대를 향한 달음박질을 마치고 스스로 부여한 존재의미를 완수하는 그 날이 오면, 우리 사회적협동조합 길목도 멋지게 소멸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