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CBS Youtube 캡처)
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2 : 평화의 길목에 선 교회
최근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과정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연장을 강요하는 미국의 노골적인 태도에서 우리 역사의 고통스런 진실을 본다. 말이 좋아 ‘분담금’이지 미군주둔지 가운데 전범국이었던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내지 않는 비용을 한국에는 터무니없이 청구하고 있다. 불평등 협정으로 알려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규정마저 어긴 방위비분담금은, 심지어 일본에게조차 요구하지 않는 군사시설건설비와 군수지원비까지 포함(2017년의 경우 전체비용의 62%)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채 사용하지 못해 이자놀이까지 한 상황에서 사과는커녕 다섯 배가 넘는 금액을 더 내라고 강요하는 관계를 가리켜 ‘동맹’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본질이 드러나듯이 평화체제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큰 암초가 무엇이었는지 그 실상을 보게 된다.
우리 사회는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남긴 대결과 갈등에 시달려왔다. 분단체제의 적대적 구도가 만들어낸 사회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은 한계상황에 부딪치곤 했다. 상대방을 붕괴시켜서 자신의 번영을 달성하려는 구도 속에서 흑백논리와 혐오담론 등 온갖 정신의 피폐가 쏟아졌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했고, 자신도 모르게 증오와 대립의 정신에 물든 채 사랑과 평화의 삶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런 와중에 2018년의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선언’을 통해서 일어난 한반도의 탈냉전 기류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하지만 올해 2월 하노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다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분단체제의 질곡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절감케 한다.
사실 한반도만의 문제도 아니다. 동북아시아는 세계적 규모의 경제적 교류와 협력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결정하는 기구나 제도가 분명치 않고 전쟁과 충돌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여기에는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과정의 산물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주도 관리해 온 미국의 패권전략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충돌의 근본 요인이라 하겠다.
최근 한반도에 탈냉전의 흐름이 가시적으로 표출된 것은 한국의 분단체제와 동북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균열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촛불혁명을 통해서 남북 대결과 갈등을 정치적 동력으로 삼던 보수정권이 몰락하고, 시민들의 평화에 대한 갈망을 정부차원에서 수렴할 수 있는 정치적 여건이 마련되었다. 또한 북한의 핵무력이 완성됨으로써 더 이상 미국이 북을 배제하는 전략을 유지하기 어려운 여건도 생겼다. 미국의 외교안보전문 싱크탱크(Atlantic Council)도 인정했듯이 북은 ‘미국의 구조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장에 나섰고, 핵무력을 완성함으로써 미국을 대화의 자리로 끌어냈다. 미국은 이전의 냉전적 관리방식을 변경해야만 하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재편성되고 있는 동북아 질서에서 어떻게 평화의 길을 넓혀 갈 것이냐 하는 점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요청되는 한국의 자세는 일방적 한미동맹을 고수하기보다는 다각적인 관계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는 유연한 전략일 것이다.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논의과정에서 이미 보았듯이 군사동맹에 기초한 기존의 대미 의존정책은 국가적 이익을 해칠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도 해악적이다. 미국에 굴종적인 외교관행 역시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스스로 제한하고, 대외 협상력과 역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빚고 있다. 비대칭적 한미 군사동맹에서 벗어나 대등한 정치적 협력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억제하는데 만족하는 ‘안보’ 국가가 아니라 평화를 정책의 수단으로 삼고 살아가는 ‘평화’ 국가의 이상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을 이룬 나라라면 새로운 국제관계를 만들기 위한 창조적 활동을 펼치지 못할 것도 없다.
분단체제를 종식시키는 것은 한반도 평화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즉, 지속가능한 지구공동체를 짓는 일에 힘을 보태는 일이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교회는 이 카이로스의 시기에 믿음의 좌표를 재설정하고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대결과 증오의 체제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었다. 한국교회 역시 그러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시작된 미군의 점령정책은 친일잔재를 승계하여 자주적 세력들을 숙청해가며 반공주의적 분단체제를 형성시켰고, 이 과정에서 개신교 교회는 일정한 책임이 있다. 또한 한국전쟁을 겪으며 완성된 체험적 반공주의로 인해 교회는 내부적으로 분단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었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의 평화와 통일운동이 전개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특히 이념 대결과 공안통치의 시기에 국제적인 협력과 연대 속에서 남과 북이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통일의지를 고취시킨 상징적 활동을 벌인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체 한국교회의 측면에서 보면 여전히 한반도 통일선교의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80~90년대에 보여주었던 예언자적 활동을 확장시키지 못했을까? 교회 내부적으로는 신자유주의라는 불안의 시대에 성장주도적 활동에 매몰되어 한반도 통일선교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외부적으로는 정부차원에서 전향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일을 직접 하게 됨에 따라 교회가 해오던 기존의 통일운동 방식이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과 의미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앞으로 기독교 통일운동을 구상하는데 중요하다고 본다.
민주정부가 수립되면서 군부독재 시대의 공안 통치에 맞서 해오던 선도적/상징적 통일운동은 변화 요청을 받았다. 김대중 정부의 ‘6·15선언’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남북교류와 방북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고, 정부가 주도한 통일정책에 민간부분의 목소리가 일정부분 수용되었다. 심지어 구체적 사안에서는 정부시책이 앞서 나가는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남북관계라는 특수성 속에서 국가주도적인 양상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열려진 공간에서 진행되는 교류 활동의 수량적 측면에서 자본과의 경쟁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평화를 향한 길목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퇴행 경험에 비춰보아도, 다시 열린 탈냉전의 기회에서 정부와 자본이 주도하는 활동의 한계는 분명하다. 민(民)이 주체가 되는 운동이 필요하다. 교회의 통일운동에서도 상층 지도부만의 활동보다는 평신도들과 작은 교회까지 주체가 되는 운동이 모색돼야 한다. 또한 시민사회와 분리되지 않고 이웃종교와의 연대까지 고려하여, 국가주도 활동이 담보할 수 없는 풀뿌리 평화운동이 펼쳐져야 한다. 더 나아가 자본과 기업 활동이 유발하는 공동체의 파괴에 맞선 상상력 있는 대안 체제 운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지난 정권에서 단절된 남북교류와 미국주도의 대북제재로 인한 현재의 교착상태와 경색국면을 돌파할 결단력 있는 조처 역시 필요하다. 진보적인 교회가 먼저 나서서 새로운 길을 내는 과감한 운동도 가능하다고 본다. 수도권만이 아니라 권역-지역별로 역할을 하도록 교단적인 협력도 필요하다. 이러한 연대활동은 활력을 잃어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는 길이기도 하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교회 자체가 먼저 신자유주의화 되어서 연대감이 해체된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왔고, 그 과정에서 정신의 쇠퇴와 조직의 부패를 거듭해왔다. 이제 화해와 용서의 복음으로 스스로를 씻고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교회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선교에 헌신함으로써 다시 민족의 가슴에 자리 잡는 종교로 회복돼야 한다. 그 일환으로 교단과 교회의 선교역량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해외선교에 쏟았던 관심을 한반도 선교를 위해 일정부분 전환하고, 여기에 도시-농촌 교회간의 협력적 지혜가 발휘될 수 있도록 구상하면 좋겠다.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의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중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남북 교류협력 관계를 지어갈 필요가 있다. 그 동안 기울인 평화통일운동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경험을 통해서 형성한 남북의 신뢰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운동은 외적인 활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고백에서 비롯되는 운동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평화의 길목에서 교회는 신앙의 양심과 상식에 입각하여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작동시켜야 한다. 교회의 선교가 당위를 넘어 동경으로 구성된 부름을 입을 수 있다면, 비판과 저항만이 아니라 대안을 실험하는 교회와 신앙인을 길러낼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입을 맞춘다.”(시 85:10)는 성서적 상상력이 우리를 이끌어주시길 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