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무늬인 종교성에 대한 성찰 23 : 하나님나라
기독교인들의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는 새로운 종교 창시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어떤 부름(召命)에 이끌린 사람이었다. 복음서에 나온 그의 모습은 ‘하나님나라’(basileia)에 관한 복음으로 식민지 생활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과 사랑의 불을 지른다. 그가 지른 불이 내 맘에도 타고 있다니 신기하다.
그런데 내 맘을 태운 불이 정작 예수가 지른 불이긴 한가? 불꽃의 색은 다르다 할지라도 인간의 맘을 흔드는 격동으로서의 성격은 과히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그가 전한 하나님나라는 무시간적인 피안(彼岸)의 나라가 아니라, ‘로마의 평화’라는 제국주의 슬로건 아래에서 평화를 맛보기는커녕 갖은 수탈과 억압을 당했던 사람들의 호소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나라 복음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된 반면, 고통을 유발하는 기득권자들에게는 종말론적인 심판의 말씀이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라난 ‘하나님나라’ 사상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그 역사성은 희미해지고 신학적 물음으로 전환되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나라 사상이 악(evil)의 문제가 해결된 역사와 우주의 완성된 상태에 관한 신학적 논의, 종말론(eschatology)이라는 사상으로 조직되어간 것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두 가지 극단적 사고를 오가며 조정되어왔다. 하나는 ‘종말’(eschaton)을 ‘역사적 시간’의 끝으로 보는 사고이다. 이 생각은 재주 없는 철학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오랜 기간 동안 통용되어왔다. 이 생각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에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며, 따라서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나라인 천국(天國)은 이 세상에 지어질 수 없다‘고 봤다.
이 생각은 단순명료하게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을 대립시킴으로써 대중적 이해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사고에 담긴 분리주의적 결함은 진지한 사람들을 늘 실망시켰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13세기의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시간과 영원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요, ‘영원(eternity)은 시간의 깊이(depth)’라고 했다. 그 사상이 오늘날까지 영감을 주고 있다.
또 다른 사고의 극단은 평면적 역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생각은 천국이라는 말에 담긴 ‘영원’(eternity)이라는 함의를 이 세상의 가치에 동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자들(zealot)에 의해 신봉되었다. 근대 이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합리적 이성은 인간이 꿈꾸는 본질적 이상이 역사 안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헤겔에 의해 제창된 이 낙관적 ‘본질주의’(essentialism)는 천국을 역사 속에 꽃피우려는 휴머니스트들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꿈꾼 그 나라는 말 그대로 이 역사 안에서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였다. 낙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희망보다 더 큰 슬픔을 안곤 했다.
종말론에 관한 기독교적 상상은 이런 두 극단을 피하면서, ‘하나님나라’라는 상징(symbol)이 사람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찾고자 했다. 그 가운데 발견한 것은, 하나님나라가 상징하는 실제적 가르침은 ‘세상의 종말’을 논하는 관념적 우주론이 아니라, ‘악의 종말’에 관심하는 신학적 실재론에 해당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믿음이란 세상에 대한 ‘절망과 포기’보다는 삶의 ‘책임성’을 요구한다.
문제는 이런 신학적 각성이 현실 종교를 주도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종말론은 대체로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을 유포하며, 역사가 해산의 진통을 하며 창조해가는 가치를 비하한다. 그런 사고방식은 비종교인뿐만 아니라 진지한 신앙인에게조차 해답이 되지 못한다. 진정한 믿음은 이 세상을 긍정하는 강건함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만일 이 세상이 ‘신이 사랑하여 스스로 화육(化育)할 만큼’ (요3:16, 고전7:23) 가치를 지닌 곳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기독교의 모든 믿음은 곧장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책임과 존중이 신의 영광에 관한 찬양과 대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지한 영혼은 잘 알고 있다. 이런 분별이 없는 형식적 교리주의는 마치 세상에 대해는 ‘절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서 탐욕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 거룩한 무리를 양산한다.
신학적 초자연주의를 패퇴시킨 근대의 과학적 자연주의에 익숙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사실상의 의미를 잃었다. 기독교 정통신학이 신을 초자연의 영역에 위치시키고, 믿음을 마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입장권이나 되는 듯이 가르쳐왔는데, 그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대적 우주론을 새롭게 연 갈릴레이가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은 단지 천체의 운동방식에 관한 이해를 변경시킨 것에 있다기보다는, 하나님나라가 위치할 우주적 ‘공간’(space)을 지성의 영역에서 제거한 데에 있다 하겠다. 근대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교리적 가르침은 이제 ‘공간적’ 의미에서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는 과연 무엇일까?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나라는 이 세상 ‘안에’(in) 있지만, 이 세상의 ‘것은’(of) 아니라고. 그 나라는 악으로부터 분리된 선의 나라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극복해가는’ 나라라고. 사람들의 영혼을 이끄는 비전으로서의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수록 커질 것이고, 이 세상을 넘어설수록 매혹적인 것이 될 것이다. 예수는 그 나라를 가리켜 세상 저편에 이미 존재하는 황금왕국이 아니라, 겨자씨처럼 자라나는 나라라고 했다. 믿음의 사람은 그 나라를 오늘 여기서 꿈꾼다.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나라는 보상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이다. 고통의 세계에 공감(compassion)하지 않고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에, 자신의 ‘지금 여기’에 대한 심판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차마 말하지 말자. 이 세계의 언어만으로는 그를 위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