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우리다
연극심리상담과 병행하여 노동조합에서 상근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조합원들의 인식이 기성세대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들은 신입사원임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에게 쫄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며, 이전에는 당연시 해왔던 조직문화에 대해 ‘몰상식한 문화’라고 단호히 거절하고, 여러 모로 본인들이 인정할 만큼의 실력을 보유하지 못한 선배들의 조언과 충고는 ‘꼰대’라고 흘려보내기도 한다.
이런 청년조합원들을 보면서 솔직히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속으로 ‘예의가 없네’, ‘이기적이네’, ‘니들도 언제까지 잘 나갈 줄 아냐. 언젠가는 선배들 심정을 이해하게 될 거다.’, ‘왜 저렇게 피해의식을 갖고 있지.’, ‘왜 저렇게 인정이 없지.’ 등의 생각들로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슬픈 일은 오랜 투쟁 끝에 어렵게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기로 합의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청년조합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일이다. 청년조합원들은 본인들과 같은 평가체계를 거치지 않고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조직의 성장을 이끌어 온 선배들의 ‘피, 땀, 눈물의 기여’가 ‘정규직 전환채용의 공정함’을 대체해 줄 수 없다.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것일까.
좀 더 진보적이라는 노동조합, 소통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고 있는 노동조합마저도 청년조합원들에게는 ‘꼰대들의 집합체’같이 여겨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위기의식과 함께 그들의 문제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을 다시 나에게로 우리에게로 하나하나 거둬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일반적인 것을 상식적인 것이라고 배우며 서로 비슷하기 위해, 튀지 않기 위해 나의 개성을 죽이고 눈치를 보면서 어른이 되었다.
이렇게 어른이 된 우리들은 우리의 한을 풀어내듯 ‘다름을 인정해라!’,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차별은 나쁘다는 것만을 또 주워 삼킬 뿐 평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것을 일반화 시키는 “주류”의 무리에 속하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고, 내가 속하지 않은 소수 무리들은 나와 다른 것이 아니라 상식적이지 않다는 이유를 만들어 여전히 차별을 일삼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주류”울타리 안에서의 “다름”이 경쟁력임을 알기 시작했고, 우리의 아이들에겐 세상에서 유일한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키며 키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허기진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남들과 다름을 어필하기 위한 스펙을 쌓으며 커나갔다.
이렇게 청년이 된 우리의 아이들은 그 어려운 경쟁을 뚫고 당당히 정규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평등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
그 결과 나와 같은 일을 함에도 나와 같은 스펙이 없는 이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에 반대하고 그게 공정한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한 사고가 아닌가.
나만큼의 특별함이 없는 그들이, 그저 철밥통 같은 그들이 나랑 같은 정규직이 된다는 건 평등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더욱이 특별함과 노력이 정비례의 곡선만을 이룬다고 배워온 그들에겐 말이다.
“남들 어학연수 다니고 스펙 쌓을 때 뭐했어요?”
“열심히 아르바이트 하며 학업 병행 했습니다”
이런 광고가 청년들의 마음을 묵직하게 할 수는 있어도 타인에 대한 공감의 기회로까지 이어지긴 어려운 이유다.
특별하기 위해 이들 역시 사유할 여유조차 없이 개발에 땀 나듯 살아왔기 때문이다.
가슴 아프고 답답하지만 여전히 평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우리 어른들은 이에 대해 마땅한 얘기도 못해준다.
문제는 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