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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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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별의 감사 일기

posted Jul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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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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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할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문득 매일 감사한 일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한 것에 대해 쓰다가 개강을 했습니다. 매 학기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가 있는데, 매일 공책에 손으로 글쓰기입니다. 학생들에게 솔선수범하려고 저도 함께 쓰기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렇게 종강까지 넉 달 동안 쓴 감사 일기를 소개합니다. 물론 74편 전부를 싣지는 못합니다.

(전문은 브런치 매거진에 있습니다. ▶)

감사한 분들도 감사한 일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그중 개에 관한 글만 추려보았습니다. 그 개 이름은 콩이. 주인집 개인데 주인이 집에 주 2~3회 오셔서 제가 돌봅니다.

 

일곱째별_IMG_0128.jpg

 

 

thanks to trust 콩이의 신뢰에 감사합니다

Feb 25. 2024

 

비싼 가위를 샀습니다. 콩이의 엉킨 털을 잘라주려고요. 펫샵 주인이 강아지를 높은 데 올려놓고 꼼짝 못 하게 한 후 한 번에 자르라는 요령을 알려주었습니다.

 

산책 후 빨간 고무통을 엎어놓고 콩이를 올려놓았습니다. 폴짝 뛰어내립니다. 더 높은 고무통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제 키보다 다섯 배는 높은 데서 다시 뛰어내립니다. 사냥개도 아닌데 용감합니다.

 

하는 수없이 그냥 포장재에서 가위를 꺼내 들었습니다. 콩이는 가위를 처음 보았나 봅니다.

무서운지 위험한지도 모르고 가만히 있습니다.

 

스윽~

 

가위 날이 무섭게 섰습니다. 귀 뒤에 꽁꽁 뭉친 털을 잘랐습니다. 날카로운 가위로 여러 번 털뭉치를 잘라냅니다. 실수로 귀를 자를까 봐 조금씩 자릅니다.

 

콩이는 가만히 있습니다. 이렇게 얌전한 걸 괜히 겁주려고 높은 데 올려놓으려고 했네요. 상으로 간식을 조금씩 줍니다. 꼬리에 뭉친 털에 붙은 씨앗까지 자르려고 했더니, 꼬리 만지는 건 싫어합니다. 뱅글뱅글 돕니다. 그래도 제가 의지를 보이자 가만히 있습니다. 엉덩이 부분의 더러운 털도 잘라주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엉킨 꼬리를 더 잘라주려 하자 도망가다가 품 안으로 파고듭니다. 바깥에서 살며 온갖 데를 다 다니며 목욕도 안 한 콩이는 사람 손길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콩이의 엉킨 털을 처음 사 본 가위로 잘라주었습니다.

 

저를 믿어주는 콩이에게 고맙습니다.

 

 

thanks for the smiling dog 미소 짓는 콩이에게 감사합니다

Feb 28. 2024

 

요즘은 외출 전과 후에 짧은 산책을 합니다. 콩이와 함께요. 멀리 갈 수 없어 목줄을 잡고 원래 코스의 절반도 못 가 되돌아옵니다. 해가 조금씩 길어져 오후 7시 직전 어둑해지는 길을 콩이와 걸어가다 서둘러 돌아옵니다.

 

어제는 자동차로 귀가했는데 콩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어디에선가 콩이가 나타나 깡총깡총 뜁니다. 집주인이 목줄을 풀어주었습니다. 살살 주차를 하고 짐은 차에 둔 채 나섰습니다.

 

콩이는 옆에서 발맞춰 걸으며 자꾸만 제 얼굴을 올려다봅니다. 활짝 활짝 웃으면서요. 개가 웃는 거 아세요? 맞습니다. 개가 웃습니다. 솜털처럼 눈송이처럼 포근하게요. 처음부터 웃은 건 아닙니다. 저를 점점 더 좋아하면서 표정이 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개나 마찬가지. 좋아하는 상대 앞에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죠.

 

목줄 없는 콩이는 달려갈 수 있는데도 저와 나란히 걷습니다. 두 발 보폭에 네 발 속도를 맞춥니다. 길로 나가 잠시 뛰어가더니 뒤돌아 저를 보고는 되돌아 달려옵니다. 화알짝 웃으면서요.

 

저는 뒤돌아 집으로 향합니다.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콩이는 돌아가는데도 또 옆에 나란히 걷습니다. 개와 나란히 걷는 기분은 무척 배려받는 느낌입니다. 제가 콩이에게 맞춰주는 게 아니라 콩이가 제게 맞춰주는 거니까요. 할끔할끔 한참 위로 올려다보며 활짝 활짝 웃으며 함께 걸어주는 콩이에게 고맙습니다. 손잡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산책도 참 따스합니다. 웃어주며 함께 산책하는 콩이에게 고맙습니다.

 

 

thanks for being safe 봄날의 무사함에 감사합니다

Mar 23. 2024

 

모처럼 눈을 떴다가 또 자고 여유 있게 일어났습니다. 15분간 스트레칭을 하고 일주일 만에 쌀밥을 했습니다. 밥을 먹고는 콩이에게도 사료를 줄까 하고 나가 보았는데 바람이 따뜻했습니다. 헬멧을 쓰고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콩이 목줄은 풀어주었습니다.

 

콩이와 함께 달렸습니다. 코끝에 닿는 바람이 따스합니다. 훈풍입니다. 직선거리를 한참 달리다 왼쪽으로 코너를 돌고 돌 때쯤이었습니다. 뒤에서 승용차 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달리는 자동차만 보면 미친 듯 따라가는 콩이는 컹컹 짖으며 자동차 바퀴를 따라 맹렬히 달리는 듯했습니다. 시골길은 자전거와 자동차가 동시에 달리기엔 너무 좁습니다. 왼쪽 난간 옆으로 바짝 붙어 가는데 차도 속도를 늦추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자동차를 가로지른 콩이가 자전거 앞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바퀴가 털에 닿는 순간 급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너무 놀라 자전거에서 내려, 세워둘 틈도 없어 옆 난간에 자전거를 기대 두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황급히 자동차를 향해 인사하고는 콩이를 붙잡아 살폈습니다. 창문 열린 자동차가 천천히 지나가며 "(개가) 너무 좋아서 그래."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콩이는 어떻게 된 걸까? 갈비뼈라도 부러졌으면 병원에 가야 할 텐데, 오늘은 토요일, 문 연 동물병원이 있을까?'

 

콩이를 살펴보며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아스팔트 위에 콩이를 눕히고 여기저기 유심히 살펴보며 문질러 주는데 콩이가 가만히 있습니다. 아스팔트의 온기와 사람 손길에 몽롱해지는 듯했습니다. 잠시 후 일으켜 세워보니 걷습니다. 자전거를 끌고 따라가며 살펴보니 멀쩡합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가니 콩이가 달리기 시작합니다. 집에 도착한 콩이는 물을 마시고는 땅바닥에 엎드립니다. 옆구리를 만져보니 헥헥거리며 지친 듯 가만히 있습니다.

 

콩이를 묶어두고 반대 방향으로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다시 집에 갔을 때 만약 이상이 있으면 병원에 가야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가까운 지역 경계를 넘어 막다른 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골목으로 자전거가 들어오는 걸 보자 콩이가 펄쩍펄쩍 뜁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저녁이 되기 전, 다시 나가 콩이 목줄을 잡고 산책을 했습니다. 콩이는 여전히 활발합니다.

윗동네에 매화가 피었습니다. 봄날입니다. 무사함에 감사합니다.

 

 

thanks for my love in action 사랑의 실천에 감사합니다

May 27. 2024

 

태풍이 불기 직전에는 바다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합니다. 전날 보낸 이메일에 새벽녘 놀랍고 감사한 답장이 도착했다. 정오 전에 집을 나서서 탈핵신문을 읽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금계국 가득한 길을 산책했습니다. 하루를 잘 보내고 집에 돌아와 마무리로 콩이랑 동네 한 바퀴 산책했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 수거일이라 한 달에 한두 번 버리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섰습니다. 콩이를 데려갈까 말까 하다가 한 바퀴 더 산책시키자고 함께 나갔습니다. 300m 앞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동네를 돌아 집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오던 콩이가 울타리 너머 동네 개들한테 관심을 보였습니다.

 

갑자기 개 세 마리가 달려들더니 콩이를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개들을 쫓아냈습니다. 두 마리는 도망갔고 제가 가도 한 마리는 콩이 다리를 계속 물고 늘어졌습니다. 소리를 질러 개를 쫓아내고 간신히 콩이를 진정시켰습니다. 그런데 콩이가 오른쪽 앞다리를 땅에 딛지 못합니다. 하는 수없이 콩이를 안고 집까지 왔습니다.

 

처음입니다. 콩이를 안아본 건. 콩이는 밖에서 사는 개라 목욕을 자주 못 해 더럽거든요. 어제 빗질을 싹 해줬지만, 냄새는 어쩌지 못합니다. 콩이는 처음 안겨보는 제 팔에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측 앞다리에 손을 대면 파르르 떠는 게 많이 아픈 듯했습니다.

 

콩이를 자동차 조수석에 싣고 동네 동물병원을 검색했습니다. 오후 7시가 넘어 전부 진료 마감이었습니다. 한군데 전화를 하니 원장에게 착신이 되어 통화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대전에 24시간 진료하는 동물병원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길로 달려갔습니다. 가면서 집주인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잠시 후 주인이 전화하셨습니다. 병원 가면 이것저것 검사하고 돈이 많이 드니, 주인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항생제만 처방받아 오라고, 운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콩이는 늘 자동차를 타던 강아지처럼 우아하게 조수석에 앉아있었습니다. 아픈 발은 계속 들고 있는 상태로요.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여 달려 도착한 동물병원에선 강아지가 개 세 마리에게 물렸다는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다른 병원에 가라고 합니다. 다른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 8:35. 콩이가 다섯 살(나중에 한두 살 더 많음을 알았지만) 포메라니안 수컷 6.3kg이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밤에 갔는데도 30분을 기다렸습니다. 제 무릎에 올려놓고 안은 콩이는 새근새근 얌전하게 가만히 있었습니다. 따뜻한 체온에 안심하는 듯했습니다. 처음으로 아파야 안길 수 있다는 걸 알았을까요?

 

마침내 수의사를 만났습니다. 당연히 털을 깎고 X-ray를 찍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포메라니안은 털을 깎으면 안 자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주인과 통화했습니다. 저는 콩이의 주인이 아니라 결정권이 없으니까요. 주인은 털 깎으면 안 자라서 밉다고 그냥 항생제만 처방해 달라고 하십니다.

 

상황을 파악한 의사가 다행히도 그냥 X-ray를 찍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결과는 골절. 그것도 분쇄골절. 뼈가 조각조각 났습니다. 당장 입원시키고 수술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수술을 안 하면 통증으로 쇼크사할 수도 있고 썩어들어가는 괴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수술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수술비는 320만 원. 의사가 동네 근처 병원을 알아봐 주었는데 그런 (큰) 수술은 못 한답니다. 주인에게 전화했더니 그냥 데리고 오랍니다. 제가 콩이를 문 개 주인에게 찾아가 치료비를 달라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서울이면 모를까 사실 시골에서는 승산 없는 다짐이죠. 그래도 항생제 먹여서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뼈가 부러진 다리를 치료도 안 하고 그냥 데려갑니까? 밤새 아파하는 콩이를 어떻게 봅니까? 주인에게 다시 전화했습니다. 이대로 데려갈 수는 없다고, 제가 수술비를 보태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데려오랍니다. 울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전액 다 대겠다고. 그러자 그럼 하는 수 없지 하십니다. 3만 원 주고 사 온 강아지에게 300만 원 들일 시골 노인은 안 계실 겁니다. 그리고 제가 데리고 나가 일어난 사고니 제가 책임져야죠.

제 모습을 보던 의사가 하도 딱했는지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왔느냐고, 교회 다니시는 분 같은데, 그 동네에서 3년 군 생활을 했다고 특별히 지인 할인 10%를 해주겠다고 합니다.

 

눈물이 글썽해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잘한 거죠?"

"그럼요. 좋은 일, 선한 일 하신 건 반드시 어딘가에서 돌려받으실 겁니다."

 

콩이는 혈액(혈구, 혈청, 가스) 검사를 하고, 진통제와 소염제 특수주사를 맞았고, IV정맥 카테터를 장착했습니다. 다행히도 수술받을 정도로 몸 상태가 건강했습니다. 하지만 하얀 털이 북실해서 몰랐는데 다리털을 밀어보니 물려서 피 난 자국이 역력합니다. 수술 확인서에 보호자 사인을 하고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수술 후가 더 중요하다고. 두 달은 실내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합니다. 콩이는 태어나서 한 번도 실내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개입니다. 누가 콩이를 돌보나요?

 

밤 11시 10분. 다음 날 오전에 수술하기 위해 보호 케이지 안에서 다리에 붕대를 감고 수액 맞고 있는 콩이를 면회했습니다. 콩이는 절뚝절뚝 제게 다가왔습니다. 제 눈에선 다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콩아, 수술 잘 받아. 내일 또 올게. 미안해. 그 개들 더 빨리 쫓아내 주지 못해서."

 

청구서에는 2,889,000원이 찍혀 있습니다. 동물병원에선 원래는 선납해야 수술을 해 주는데, 의사의 선처로 일단 가진 돈만큼 내고 가고 퇴원할 때 완납하라고 해주었습니다. 수납창구에서도 제가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임을 압니다. 현금이 없어 10만 원만 결제하고 퇴원할 때까지 돈을 마련해 오겠다고 했습니다. 일주일 안에 학기 중 월급의 두세 배인 거액을 마련할 수 있을까요? 곧 급여도 없는 방학인데……. 어떻게든 해야죠.

 

돌아오는 길에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은 아픈 상대를 모른 척하거나 그냥 두지 않습니다. 아플 때 더 안아주고 잘해줍니다. 사랑은 소유하는 게 아니라 책임지는 겁니다. 사랑은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일들이 간단명료하게 정리되었습니다.

 

저는 콩이의 주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콩이는 저를 사랑합니다. 저는 그 사랑에 반응할 뿐입니다. 오늘 사랑의 실천을 하게 해준 콩이에게 고맙습니다.

 

자정이 넘어 집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사준 목줄이 땅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목줄 끝에서 제가 왔다고 팔짝팔짝 뛰던 콩이는 지금 없습니다. 콩이 없는 집은 적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어린 것이 그동안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지켜줄 차례입니다. 콩이가 수술 잘 받고 다시 건강해져서 돌아오길 간절히 바랍니다.

 

 

thanks for protection Gmgang 금강 지킴에 감사합니다

May 28. 2024

 

콩이는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의 염려와 사랑으로 잘 완쾌할 것입니다. 병원비를 빌려주겠다는 요정, 기부하겠다는 후배, 사리 분별을 알려주신 선배…… 덕분에 저도 기운 차릴 수 있었습니다.

 

콩이를 문 개들은 유기견인 줄 알고 신고했다가 경찰과 소방관이 총출동해서 단속했습니다. 다시는 마을에서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저는 사랑하는 존재를 반드시 지킬 겁니다. 다시는 허무하고 무력하게 잃지 않을 겁니다.

 

콩이 면회를 했습니다. 부러진 다리뼈에 핀이 잘 박혔다고 합니다. 기운 없는 콩이에게 수술 잘 받아줘서 고맙다고, 얼마나 아프냐고, 어서 기운 내라고, 또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보 한두리교 아래로 농성천막을 지키러 왔습니다. 마음은 매우 힘들지만, 지난주 약속이라 왔습니다. 이 밤도 살아있는 생명을 지킬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thanks for the miracle 기적에 감사합니다

May 29. 2024

 

밤새 추웠습니다. 윗옷을 네 겹이나 껴입고 라이너와 침낭 안에 들어갔지만, 강바람은 차가웠습니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차곡차곡 침구를 정리했습니다. 텐트를 열고 바깥 천막 지퍼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우와~~ 햇빛 받아 찰랑거리는 금강이 어제보다 더욱 빛나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노숙이 체질에 맞나 봅니다. 콩이가 물리던 그 순간부터 이틀간 악몽 같던 기분이 차분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집주인이 콩이 오면 깔아주라고 하신 헌 이불과 콩이가 매일 엎드려있던 보금자리를 손빨래해서 빨랫줄에 널었습니다.

콩이가 돌아오면 제가 돌볼 겁니다. 완치될 때까지 두 달 동안. 그래서 콩이가 퇴원할 때까지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이 생겼습니다. 콩이를 한 번 안아본 후배입니다. 그 촉감을 잊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이는 슬픔과 절망과 자책에 빠져 허우적대던 제 글을 새벽에 읽고는 어제 전화로 격려해 주고 지지해 주고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계좌번호 알려달라는 걸 곰곰이 하룻밤 생각해서 그 마음을 받기로 했습니다. 강아지 용품으로.

 

제가 종종 뭔가 선물 받는 걸 감사 일기로 쓰지만, 사실 저는 아무한테서나 무얼 받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뭘 받을 때는 갚을 걱정 없는, 좋아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외에는 거의 독립적으로 해결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전 뜬금없이 다시 비움 실천 3을 쓰면서 그동안 좋아하지 않던 당근에 가입했습니다. 물건을 공유할 때는 그만큼 친밀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 시골에는 헌 옷 수거함이 없어서 옷을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려야 하기에 재활용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마침 가입한 당근에 돈이 될만한 물건을 팔려고 찾아보았습니다. 콩이 병원비를 빌려주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힘닿는 데까지 제힘으로 해보려고요.

마침내 찾았습니다. 한 달여 전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 영산강 자전거 순례 때 구입한 오르트립 자전거 리어 패니어 백롤러 클래식 선옐로우. 딱 한 번 주차장에서 차로 이동할 때 사용한 거의 새 제품을 20% 할인 가격에 내놓았습니다.

 

* 강아지 수술비 마련을 위해 급매합니다.

 

잠시 후 기적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기견인 줄 알고 신고해서 경찰차와 소방차가 출동하자 보이지 않던 견주에게 연락이 닿은 겁니다. 전화한 견주는 제 상심을 염려하며 콩이 치료비를 위한 상상도 못 한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물론 이건 어떻게 진행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퇴원과 통원치료까지는 제가 경제적 책임을 져야 하기에 신중 또 신중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문득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가 떠올랐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하나님은 미리 준비한 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가진 물건 중 값나가는 자전거 가방을, 그러니까 내 소중한 걸 바치겠다고 내어놓으니 없는 줄 알았던 혹은 시골에서 다반사로 모른 척할 줄 알았던 견주에게서 연락이 온 겁니다.

이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제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가 닿았습니다. 모두의 염려가 이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thank you frog 생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사합니다

May 30. 2024

 

계단을 내려와 땅에 발을 내딛고 몸을 돌리면 기지개를 쭉 켜고 팔딱팔딱 뛰던 콩이가 없습니다. 가뜩이나 없는 기운이 더 빠집니다. 땅바닥 목줄도 그대로, 밥그릇의 사료도 그대로입니다. 동네 길고양이들이 어쩐 일로 콩이의 남은 밥을 먹지 않습니다. 걔들도 콩이가 아픈 걸 알고 차마 콩이 밥을 먹지 못하는 걸까요? 저희끼리도 의리가 있는 걸까요?

 

모퉁이를 돌아 차로 가려는데 담벼락 옆 항아리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며칠 전 습기 가득하던 날, 올해 처음으로 2층 베란다 난간에 매달렸던 그 녀석일까요? 그것도 생명체라고 반가웠습니다.

 

이른 시각에 문자가 왔습니다.

한발 늦었다고. 콩이 글 읽고 보탬이 돼야지 하고는 이틀이 지났다고…. 계좌번호 달라고~~ 꼭!

어느 밤 산책 후에 콩이 몸에 열 개 넘게 붙은 도꼬마리를 떼어내 줄 때 콩이를 붙들어 준 친구입니다. 아침부터 또 눈물 바람을 합니다.

 

수업 시간에도 친구로부터 콩이 걱정 문자가 왔습니다. 콩이와 함께 먼길 산책했던 친구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콩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제 글을 읽고 콩이를 걱정합니다. 모두의 마음이 모여 콩이가 빨리 회복하리라 믿습니다.

 

병원으로 갔습니다. 오후 2시 반. 면회시간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들어갔습니다. 화요일 수술 직후 눈도 못 뜨고 발도 못 떼고 시름시름 잠에 빠지던 콩이는 오늘 눈을 반짝이며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케이지 두꺼운 유리 벽으로 다가와 500원짜리 동전만 한 구멍으로 내민 손등을 혀로 핥았습니다. 그러더니 또 금세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붕대 푼 다리에 길게 절개하고 수술한 흔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아프고 답답할까요?

 

후배는 콩이 물품 일부를 벌써 주문했다고 합니다. 후배랑 퇴원한 콩이에게 뭐가 필요할까 치수 재고 물품 고르는 시간에 착잡했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병원비 때문에 사자마자 중고시장에 내놓은 자전거 리어 패니어는 아직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팔릴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 잘 될 겁니다. 암요. 더 좋아질 겁니다.

 

방금도 콩이 안부를 묻는 문자가 왔습니다. 콩이를 사랑해 주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 역시 저처럼 주인이 아니라도 콩이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소유와 관계가 없습니다. 집착이 아니라면 사랑은 넘쳐도 괜찮습니다. 흐르면 되니까요.

 

 

thank you for your gratitude 감사에 감사합니다

Jun 02. 2024

 

자고 또 자고 이상하게 자꾸 잠이 옵니다. 6월이 되어서야 극세사 이불을 세탁해서 널었습니다. 콩이가 병원에 간 이후로 산책을 하지 못합니다. 저는 혼자 동네 산책도 못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콩이 덕분에 그동안 산책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오전에 볼일이 있어 밖으로 나왔는데,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와 집 앞에 섰습니다. 고동색과 까만색이 섞인 큰 개 겨울이 주인입니다. 전에 몇 번 산책길에서 만나면 겨울이는 콩이가 좋아 자꾸 따라오고, 겨울이 주인은 콩이를 붙잡고 있어야 겨울이 목줄을 채운다고 지체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남자랑 말 섞기 싫어 슬쩍 피해 다녔는데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던 사람입니다.

 

"콩이 다쳤어요?"

"네. 000 개 두 마리와 들개에게 물렸어요. 저는 처음에 겨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우리 개도 그 개한테 물렸어요."

"네? 그럼 그때 알리지 그러셨어요. 그 견주는 자기네 개가 그런 적 없다고 모르고 있던데요."

 

쉬쉬하는 시골 폐쇄성이 사고에 사고를 낳은 겁니다. 외지인이 끼어들자 문제가 수면 위로 불거진 거였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죽었어요. 기차에 치여서."

악-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느 날 집에 안 들어오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음날 기찻길에서 까마귀가 울더라고요. 가보니까 기찻길 옆에……. 산에 묻어주고 나도 며칠 꼼짝도 못 했어요. 지금 있는 개는 다른 개예요."

 

덩치는 콩이 서너 배 만한데 콩이한테 겁먹으면서도 졸졸 따라오던 겨울이가 그렇게 허무하게 갔습니다.

 

겨울아, 안녕…….

우리 콩이 좋아해줘서 고마웠어.

 

텃밭에 상추가 어린잎을 내어놓고 여린 고추가 매달렸습니다. 마지막 백밀국수에 상추와 시디신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고추장에 비벼 먹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제가 보낸 릴리 사진에 답이 와 있었습니다. 몇 번의 근황이 오가고,

 

'별님, 콩이의 수호신이네요. 지키려 한 바 없으나 부지불식...~~~'

 

그러게요. 신은 아니지만. 지키려 한 바 없으나 부지불식, 그게 정답이네요. 그리고 마무리 멘트,

'사랑이 많은 별님… 나는 좋아염.'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드디어 노트북을 켰습니다. 학교 LMS에 들어갔더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지도해 주신 0000팀이 공모전 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제작한 다큐멘터리 장르를 교수님의 조언과 지도를 통해, 이렇게 수상의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잘 따라와 준 학생들에게 고맙습니다!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매일 무언가를 공책에 쓰라는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시킬 때 시키기만 하지 않고 저도 함께하는 편이라 연초에 쓰던 감사 일기를 매일 써나갔습니다. 학생들이 알건 말건 스스로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요. 학기 말이 다가옵니다. 이제 감사 일기를 슬슬 마무리할 때가 다가오는 듯합니다.

 

 

thanks bolt&nut 나사에 감사합니다

Jun 03. 2024

 

새벽 세 시 반까지 프리뷰를 하고 잠깐 누워 허리만 편다는 게 깜빡 잠을 잤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과 점심까지 꼬박 구성안을 작성했습니다.

200cc 한 컵 쌀로 밥을 하면 두 끼 먹습니다. 밥을 하고 달걀을 삶아 먹었습니다. 콩이 면회 가야 하니까요.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습니다. 커피믹스에 우유 타서 한 잔 마시고 싶은데 커피가 없네요. 건너뜁니다.

 

두 시 반에 길을 나섰는데 도로 공사로 길은 막힙니다. 비몽사몽 병원에 도착해 콩이를 만났습니다. 어제 일하느라 못 봤더니 콩이 눈이 반짝반짝 절 보더니 아픈 다리로 겅중겅중 뛰려고 합니다. 매번 잠드는 걸 보고 오는데 오늘은 면회시간 20분이 다 되도록 잠들려다 다시 깨고 맙니다.

 

다시 한 시간 걸려 집에 옵니다. 왕복 세 시간 걸리는 면회. 이제 이틀 후면 콩이는 퇴원합니다.

 

후배가 사 보내준 켄넬을 조립했습니다. 은색 볼트 열 개를 구멍마다 넣고 아래에서 너트를 구멍에 맞춰 돌리고 위에서 조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나사를 맞춰서 조일 때마다 기분이 일 센티씩 내려앉습니다. 음악도 없이 고요한 중에 나사를 조이는데 마음은 조여지지 않습니다. 조립하는 거 좋아하는데 신이 나지 않습니다. 손으로 하는 일을 할 때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 봅니다. 짜잔~ 이거 봐라. 나 잘하지? 이렇게 으스대고 싶은데 보여줄 사람이 없습니다.

"콩이야, 이거 네 집이야, 잘 만들었지?"

이럴 수도 없고 말입니다.

그래도 꽈악꽉 열 개를 조이고 또 조였습니다. 문을 달고 물통도 달고 깔판도 넣어 완성했습니다. 바퀴는 구멍이 막혀 못 달지만, 바퀴까지 달면 무거워서 콩이 넣고는 들 수도 없을 터라 괜찮습니다.

 

새 개집에 남의 개털이 묻어 있습니다. 하얀 단모입니다. 개를 키우는 누군가 캔넬을 샀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되판 듯합니다. 리퍼 상품 좋아합니다. 사용하지 않은 거라면 소비하는 마음이 덜 무겁거든요. 이렇게 마음이 통하니 후배에게 용품을 부탁했겠지요. 콩이가 들어가는 순간 이 집도 중고가 될 겁니다. 곧이어 북실북실한 콩이 털이 덕지덕지해지겠죠. 똥오줌 싸다 보면 냄새도 나겠지요. 이 좁은 켄넬 속에서 두 달간 지낼 콩이 생각을 하니 마음이 가라앉나 봅니다. 더불어 두 달 칩거할 제 생활도 그려집니다. 종강하자마자 떠나려던 계획은 모두 날아 가버렸습니다.

 

나사를 조입니다.

아마 정비할 시간이 필요한가 봅니다. 뜻하지 않은 시간이 가져다 줄 미지에 감사합니다.

나사를 조입니다.

개집 한 채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맞이하는 마음을 준비합니다.

나사를 조입니다.

마음을 조입니다. 생활을 조입니다.

나사는 미국항공우주국이 아니라 볼트와 너트입니다.

나사로 만든 집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s for warm attitude 따뜻한 태도에 감사합니다

Jun 04. 2024

 

콩이 덕분에 이 사람 저 사람과 연락이 닿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는 그간 시름에 잠겨있던 친구에게서 드디어 전화가 왔습니다. 왜 계좌번호 안 주느냐고. 강아지 때문에 가슴 아픈 친구에게 어떻게 강아지에게 필요한 도움을 받습니까?

 

자정 직후 잠들었더니 중간에 깨지 않고 새벽 여섯 시 반쯤 눈이 떠졌습니다. 전날 샤워하면서 받아놓은 욕조 물로 계단 청소하고 맑은 정신으로 원고 교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남의 글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남에게 없는 것을 결핍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없다"는 것이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양이 엄마 아빠가 궁금하지 않듯이.

 

글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문자로 전하니 한참 후 답이 왔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하기에 답 대신 결핍에 관해 쓴 글을 보냈습니다. 그 글을 읽고는 콩이에게 무슨 일 생겼느냐고 궁금해하기에 사고 당일 글을 보내주었습니다. 저자는 이사 직후 콩이를 한 번 보았는데 시골에 (어울리지 않게) 고급 개라고 두고두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놀라운 건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교정비용 먼저 보냈어요. 보탠 건 아니고…. 결재를 좀 빨리해 드리는 거예요. 콩이 때문에.'

 

그러려고 알린 건 아닌데 우리는 서울과 시골에서 동시에 눈물짓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러려고 한 건 전혀 아닌데 이번 콩이 사고를 겪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제 개도 아닌 제 주인집 개에 대해서 어쩜 이렇게 따뜻하고 절절한 손길이 계속 이어질까요?

'마음 가는 곳에 지갑이 열린다.'

교회에서 자주 듣던 헌금 독려 설교입니다.

콩이의 복일까요? 제 복일까요? 친구들이 아픈 콩이에게 그리고 슬픈 제게 마음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제 곁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있음에 정말 감사합니다.

 

 

thanks for the lovely notebooks 마지막 감사 일기

Jun 05. 2024

 

오늘도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전날 모아놓은 욕조 물로 현관부터 계단까지 깔끔하게 물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날 저녁부터 꼼꼼히 읽어보던 공책들을 마저 읽었습니다. 학기 초부터 매일 쓰기 과제를 담은 학생들 공책입니다. 중간에 한 번 걷고 돌려주면서 이번에는 주제를 정해서 쓰라고 했습니다.

 

감정, 행복, 좋아하는 것들, 감사, 발견, 칭찬, 명언, 운동, 사람, 사진 등

 

자신이 정한 주제로 쓴 학생도 있고 그냥 일기처럼 쓴 학생도 있습니다. 대부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두 줄이라도 그날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매일 느끼는 감정에 관해 쓴 학생은 교수님이(제가) 자신에게 기쁨을 주신다고 썼습니다. 제게 배우면서 느끼는 기쁨과 제 마음을 통한 기쁨이 있다고. 학교 수업을 들으며 자신이 이렇게 듣고 싶어 하고 기쁨을 많이 느낀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새로운 형태의 기쁨을 느껴 기쁘다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학생은 제가 항상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라고, 저처럼 진심을 다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학생은 '우리나라 속담에 '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이, 걷는 사람보다 서 있는 사람이, 서 있는 사람보다 앉아있는 사람이 더 낫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야만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날지는 못해도 더 빨리 뛰어야 할 듯한 한국과는 전혀 다른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방과 후 보충수업으로 한국어 개인지도를 따로 해 주었는데 기말고사로 바빠 두 번밖에 못 하게 되어서 아쉬운 학생입니다. 덕분에 저는 에티오피아의 수도와 알파벳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민한 시사 문제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졌기에 동질감을 느껴 감사하다고 쓴 학생도 있었습니다. 제가 윤성희 사진작가의 <표지 없는 지도와 지워지는 사진들> 사진집을 보여주면서, SPC 그룹 제품을 먹지 않는다고 말했던 날이었습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텀블러를 가져온 학생들에게 왜가리가 그린 고양이 엽서를 세 장씩 나눠준 날도 감사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교수의 평가 점수를 받아야 하는 학생들은 억지로 혹은 좋아서 한 학기 내내 공책에 무언가를 써야 했습니다. 얼마나 귀찮고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지금쯤 글쓰기가 점점 좋아졌음을 스스로 알까요? 그리고 간혹 놀랍게도 글쓰기 실력이 부쩍 향상된 자신을 발견했을까요?

공책 덕분에 저는 학생들의 힘겨운 생활을 알게 되어 그들을 훨씬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발전하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크나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제 다음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공책을 돌려줍니다. 아마 공책이 없는 동안 허전했을 겁니다. 다시 이어서 쓰는 학생이 있기도 하겠죠. 하지만 저는 이제 이 감사 일기를 마치려 합니다.

 

매일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생기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과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고자 하는 책임감으로 쉬지 않고 감사한 것들을 찾아 썼습니다. 감사 일기를 쓰지 못하는 날엔 길뜬별이나 순례길 이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쓰다 보니 자정이 지나 다음 날 발행한 적은 있어도 쓰지 않은 날은 없었던 듯합니다. 이렇게 쓸 수 있던 원동력이 된 나의 사랑스러운 학생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앞날에 건강과 행복과 기쁨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콩이를 퇴원시키러 가야겠습니다.

일곱째별-프로필이미지_2023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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