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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목연재] 하죽도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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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들어와...

posted Jan 0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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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호수 76
글쓴이 관지

어쩌다 보니

 

하죽도20231029_180529.jpg

 

진도 팽목에서 세 시간쯤 배를 타면 네 가구에 여섯 명이 사는 작은 섬이 나온다.

하루에 한 번 배가 다니기는 하지만 그건 명목상이고 날씨가 궂으면 일주일도 고립되는 섬,

편의점도 없고 생활식수도 자체 해결이 안 되고, 자동차나 자전거도 굳이 필요가 없는

이 작은 섬에는 또 팔십 대 부부 두 분이 전 교인인 작은 예배당이 있는데

나는 이곳의 전도사이다.

 

섬에서 살고 싶은 꿈도 없었고 배 타는 것을 좋아하기는커녕 세월호 이후에는 교통수단에서 아예 제외까지 시켰는데 배가 유일한 이동수단이 되는 곳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다.

 

집을 떠나서, 섬 이름 한번 들어본 적 없고 아는 사람의 근처에도 스쳐본 적 없는

이 생면부지의 사람들 곁에서 그런데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 들어와 행복하지 않은 날이 한 번도 없었다.

 

멀리서 먹을 것이 없어 행여 굶지는 않을까, 무섭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들도

막상 이곳을 다녀가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심지어 천국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한결같다.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어요?" 혹은 "혼자 들어올 용기는 어디서 났느냐"라고.

그리고 내 답은 의외로 싱겁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 말은 내가 지금 누리는 이 행복을 목적으로 삼아,

얻으려고 계획하거나 의도하거나 노력하지 않았는데 거저 내게 주어졌다는 뜻이다.

 

 

불현듯, 예기치 않게

 

이곳으로 오게 된 그 시작은 이러했다.

그날은 그저 그런 월요일, 나른한 늦가을의 오후였고 오랜만에 거창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 3박 4일 피정 모임이 있는데 올 수 있어? 한 사람이 갑자기 빠져서..."

"그러지 뭐"

 

논산 시튼 수도원은 내가 좋아하는 곳이었고 무엇보다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흔쾌히 응할 수 있는 내 백수의 널널함이 나름 고맙기도 했다.

 

수도원.jpg

 

수도원에 도착해서 방 배정을 받고

"이리 갑자기 부르시는 이유는 뭘까, 내가 이곳에서 들어야 말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배낭을 책상에 내려놓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는데 받아보니 아는 목소리, 한 10년쯤 연락이 끊긴 동기였다.

"나 알겄소? 내가 그쪽 꿈을 3일 연달아 꾸고 오늘은 꼭 전화를 해야겄다 싶어서 하요.

섬에 안 갈라요? 거기 교회는 있는디 목회자가 없어라."

 

그 입에서 처음으로 듣게 된 섬 이름 하죽도,

나는 갑자기 하나님의 놀이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필요한 것은

 

필요한 것은.jpg

 

무사 안일 평온했던 내 삶에 소용돌이가 치듯 팽팽히 당겨지는 활시위를 느끼며

참석한 미사 강론에서 신부님은 마태복음 24장 40절 말씀으로 질문을 던지셨다.

"자,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시고 한 사람은 남겨졌네요.

왜 한 사람은 남겨졌을까요?"

 

나는 따라가고 싶어도 자격이 안 돼서, 안 데려가시니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의 해석은 달랐다. 한 사람은 매이고 붙잡힌 게 많아서 따라갈 수 없었단다. 우리는 부르시면 따라 일어서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제발 데려가 달라고 사정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에 웃음이 나왔다. 완전 확인사살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강론 시간,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3절

 

나는 아버지의 사랑도 받고 싶고 그 안에서 살고 싶다. 그러면....

마치 그러면, 이라는 다리 위에 서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섬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봐도 도무지 정보를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미리보기를 포기하고나니 나에게 필요한 건 단 한 가지였다.

과연 이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에 대한 확신.

 

그래서 수도원에서 돌아오자마자 내게 말을 꺼낸 목사님과 함께 섬에 가보기로 했다.

다행히 날씨는 화창했고 바다는 평온했다.

심지어 배를 타고 가는 내내 누군가의 손 등에 얹혀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섬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는 오래전 내가 다녔던 모교회의 마당이 떠올랐다.

그 순수했던 시절, 누구나 보면 웃음을 짓던 환대의 場.

그때 함께 배를 타고 온 낚시꾼 두 분이 웃으며 한 말씀을 던져주고 지나갔다.

"여기 살기 좋아요"

이 모든 순간들이 마치 내게는 들어와도 좋다는 하늘의 신호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 일에 관해 누구 하고도 의논하지 않았는데 다만 내 몸의 반응에는 집중했다.

이 섬의 방문을 불편해하는지, 긴장하는지, 갑자기 두통이 생기지는 않는지

얼른 떠나고 싶어 하는지 혹은 편안하고 즐거운지 더 머물고 싶은지.

결국 내가 여기를 온다면 내 몸과 함께 오는 것인데 나는 그의 의견도 존중하고 싶었던 것이 다. 그리고 내 몸은 후자 쪽을 향하고 있었다.

 

교회를 찾아 올라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밥 먹고 가라고 붙잡으셔서 몇 번 사양하다가 들어갔는데 교인의 집이었다. 그래서 밥만 먹고 나올 수가 없어서 이실직고를 했다.

"교회는 있는데 목회자가 없다고 해서 혹시 하나님이 저를 보내시는지 알아보려 왔습니다."

그분은 눈물이 그렁거리며 반가워하시는데 금방이라도 제가 올게요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고 나왔다.

우리가 섬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40분 남짓이었는데 그 사이에 이미 내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인간적인

 

인간적인 ..jpg

 

혹시 내가 막 영적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일까 좀 걱정이 되는데 사실은 의심도 많고 결정장애도 있고 또 무슨 일이든 미룰 수 있는 데까지 미루다 마지못해 하는 편이다.

 

지난 일을 복기해 보며 드는 생각은....

만약 나를 수도원으로 불러낸 친구가 사기나 치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며 사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내가 따라나섰을까? 내가 집에서 티브이를 보며 손톱 발톱을 깎고 있는데 누가 10년 만에 전화를 해서 섬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때도 내가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아마, 그 좋은 거 나 주지 말고 그대나 열심히 하시라, 튕겼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일도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땅의 일이다.

그러니 나의 결정은 믿음보다는 오히려 본능과 경험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나는 40대에 전도사가 되어서 60대까지 다섯 군데의 교회를 옮겨 다녔는데

한 번도 내가 선택권을 행사해 본 적이 없다. 그저 어디선가 불러서 오라면 가고 또 그만두라면 그만두고...

 

말이 쉽지, 막막하고 서러울 때도 많이 있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며 내가 알게 된 사실은 그분이 보내시는 곳이면 다 좋았던, 이 지나온 날의 경험이 결국 또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준 것이다.

 

내가 섬으로 들어오며 주님께 부탁한 조건은 두 가지였다.

"사택이 안전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섬에 술 먹고 깽판 치는 홀아비가 없게 해 주세요."

이것은 내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적어도 내 신앙의 행보가 가족에게 염려를 끼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예의이거나 지침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나는 홀아비가 없는 섬, 하죽도에서 지금 세 번째 겨울을 맞고 있다.

 

관지_프로필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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