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길목연재] 띵동~ 왕진 왔어요

d2d0d9

죽음과 기억, 애도, 그리고 삶

posted Mar 09, 2023
Extra Form
발행호수 고경심
글쓴이 66

"죽겠다는 소린가"로 시작되는 최현숙 소설 <황노인 실종사건>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아래 계층에 속하는 독거노인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소설 속 "가난한 노인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자신이 만든 부조리까지 보태어 징그럽게 버티며 수레를 밀어가고 있다"라고 노인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어서 황노인이 선택한 자유죽음과 공공장례식에 대한 이야기가 담담하게 이어진다.

 

최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 글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그중 한 사람은 58세에 암 투병 중 세상을 떠난 고현주 사진작가이다. 제주 서귀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2008년부터 안양소년원 아이들에게 사진 찍기를 가르치며 삶의 희망을 전하는 '꿈꾸는 카메라' 작업을 했다. 2016년 암 선고를 받고 암 투병을 하면서 2018년부터 제주 4.3사건 체험자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서 <기억의 목소리: 사물에 스민 제주 4.3 이야기>(문학동네)로 책을 냈고, 제8회 고정희상을 받았다. 이후 제주 4.3 학살터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를 올리고 사진작업을 계속하였다. 수십 개의 바구니 안에 전등불을 넣어 아름다운 색의 보자기로 싸서 학살 현장에 배치하고 새벽 동틀 무렵의 햇빛을 안으며 사라져가는 그 빛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사진작업을 하였다. 제주 터진목 바닷가에서는 바다의 썰물에 실려서 멀어져가는 바구니들을 드론으로 찍은 작업으로,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제주를 떠나야만 했던 젊은 청년들의 삶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제주43평화공원_(29).jpg

 

"기억은 힘이 세다, 시간이 지나가면 잊힐 일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는 일에 동참한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라고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아이러니하게 내 몸이 가장 힘든 시기에 제주의 가장 힘든 시기를 기록하는 일을 해왔다"라고 고현주 작가는 말했다. 2022년 11월 제주 큰바다영 갤러리에서 생애 마지막 사진전시회를 하고 12월 4일 세상을 떠났다.

 

또 다른 한 분은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님이다. 이분의 부재로 힘들고 아프고 너무 막막해서 이분에 대한 글을 쓰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다만 이분과 함께 다녔던 현장에 대한 기억으로 이분의 부재를 대신해보고자 애써 본다. 오키나와 평화기행과 제주 강정평화운동에서 경험한 예배와 활동을 같이 했던 추억들을 되새겨본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3년 후인 2014년 3월에는 임보라 목사님과 함께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현장-낮 시간 동안만 출입을 허용하고 거주하지 못하게 하는 방사능 오염 현장-을 방문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섭고 두려운 수십 킬로로 이어진 공간을 목도하는 경험도 하였다. 인근 지역 유치원도 방문했는데, 유치원 원아들이 오염된 놀이터의 모래를 교토에서 보내온 모래로 전부 교체했지만, 방사능 노출 위험 때문에 하루 한 시간씩만 야외 놀이터로 나가게 하고 실내에서만 지내게 하는 안타까운 실정도 알게 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현장에 거주민들의 희생과 피폐해진 삶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던 목사님 표정도 생각난다. 임보라 목사님께서 일본 오사카 교회 예배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성찬예배를 주관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한편 퀴어 퍼레이드에서는 무지개 색 옷과 멋진 가발을 쓰고 즐겁게 웃으면 같이 행진하면서 성찬 예배도 주관하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지인들의 죽음을 대면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애도부터 잘해야지, 슬픔과 당황함과 막막함을 같이 느끼는 사람들과 나누어야지, 그리고 그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겠지만 가지고 살아가야지, 그리고 가신 분과 나누었던 추억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지. 이렇게 스스로 위안을 해본다.

고경심.png


  1. 방문 진료 일 년을 지나오며

    방문 진료를 시작한 지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에 가보지 않은 길을 새로 만드느라,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의원에 직접 찾아가서 함께 찾아가는 진료를 다녀보기도 하고, 경험이 있는 의사들을 초빙해서 강의를 들어보기도 하고, 장애인 주치의 교...
    Date2023.09.02 By관리자 Views64
    Read More
  2. 노년의 사회학과 역할 이론

    "어떻게 건강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아프지 않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을까?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과 걱정은 60세가 지난 모든 노인들이 당면한 과제이다. "건강하지도 않고 아프고 누군가의 돌봄에 의존...
    Date2023.07.13 By관리자 Views62
    Read More
  3. 임종을 앞두고 가족들이 알아야 하는 일들

    보통 전화나 이메일로 방문진료 요청을 받을 때, 가장 빈번한 가족의 호소는 어르신이 "식사를 못 하신다"이다. 옛날 어르신들 말씀에 "곡기를 끊는다"면 죽을 날이 가까운 거라는 게 방문진료를 하면서 더 절실히 경험하게 되었다. 90세 정정하시던 남자 어...
    Date2023.06.15 By관리자 Views241
    Read More
  4. 삶에서 죽음을 미리 맞이하는 생전 장례식

    오늘은 5월 1일 노동절이라 월요일마다 나가는 방문 진료를 쉬게 되었다. 딸 부부와 손자가 주말에 와서 북적거리다가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났다. '자식들과 손자가 찾아오면 반갑고 떠나면 더 반갑다'는 말이 실감 나게 갑자기 한가로운 시간을 맞이...
    Date2023.05.11 By관리자 Views86
    Read More
  5. 생애말기 돌봄과 완화의료

    영등포의 한 아파트에 방문 진료를 나갔을 때 본 55세 여자 환자는 5년 전 뇌출혈로 전신마비가 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였고 호흡을 위해 기관지 삽관을 한 상태였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여서 위루관으로 위에다 직접 관을 통해 유동식을 주입하는 상태였다...
    Date2023.04.11 By관리자 Views84
    Read More
  6. 죽음과 기억, 애도, 그리고 삶

    "죽겠다는 소린가"로 시작되는 최현숙 소설 <황노인 실종사건>을 읽어보면 우리 사회의 가장 아래 계층에 속하는 독거노인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소설 속 "가난한 노인들은 세상의 부조리에 자신이 만든 부조리까지 보태어 징그럽게 버티...
    Date2023.03.09 By관리자 Views79
    Read More
  7.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읍에 살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동네 농사짓는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것은 <때>, 즉 시간이다. "제때 잘 맞추어야 한다"라고 동네 사람들이 어우러진 담소 모임에는 항상 나오는 말이다.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24 절기는 음력과 그에 대응하는 ...
    Date2023.02.08 By관리자 Views72
    Read More
  8. 집과 삶의 조건

    의식주(衣食住)가 인간 생존의 필수조건이라 할 때, 그중 주(住)에 해당하는 집이란 무엇일까? 주로 먹고 자고 쉬고,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매우 사적인 공간일 것이다. 집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나답게 편하게 눈치 보지 않고 제재받지 않고 마음대로...
    Date2023.01.05 By관리자 Views104
    Read More
  9. 사랑과 돌봄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으로 살아왔다. 출생 이후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 즉, 부모이든 양육도우미든, 할머니든, 아니면 보육원 교사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고 자장가 불러주고 아프면 약 먹여주고 놀이터에서 놀아주고 ...
    Date2022.12.04 By관리자 Views141
    Read More
  10.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방문의료

    76세 이모에게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아하, 왕진?”하고 대답하신다. 아마 ‘방문진료’, ‘방문의료’나 ‘재택의료’ 등의 단어보다 어르신들은 ‘왕진’이라는 말이 더 익숙하신가 ...
    Date2022.11.05 By관리자 Views64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
위로